어느 촌부가 딸 둘을 둔뒤 후사가 없었다.
후취를 얻을수도 없는 양반 가문의 후손이라
동생의 둘째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자신의 아들로 입적) 맞았다.
딸들이야 여자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정작 두딸은 중학교만 졸업을 겨우 시켰다.
일제치하에서 소학교(초등학교)라도
졸업한 사람은 읍사무소라도 다니고 군청에 근무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못배운게 한이 되어 양자인 아들(동생의 다른 아들까지)을 뒷바라지 하기 시작한다.
어렵기 그지없는 농촌 생활임에도 독일에 유학을 보내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와 공무원에 취직이 되고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서
고위 공직자 반열에 오르게 됐다.
그 아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가끔 명절에나 얼굴을 디밀고
머물지도 않은채 그냥 서울로 올라가곤 했었다.
아내가 중풍으로 쓰러져 병원에 눕게 되었는데도
양아들(양자)은 바쁘다고 한달 만에 찾아온게 전부이고
몇년을 앓다가 결국 세상을 달리하게 되는데
상을 치루는 내내 잠자리가 불편하다며 본가(친 아버지 집)에 가서 자고 왔다고 한다.
그 촌부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지만 속으론 여간 불편한게 아니였던 모양이다.
결국 내 아들이 아니면 소용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몇년간 아내의 병수발을 들던 약간 젊은 아낙과 동거에 들어가고
73세의 고령에 첫 (?)아들을 그 다음에 또 아들, 그렇게 아들 둘을 두게 됐으나
양아들 유학보내느라 가산이 많이 축나있던 끝이라
정작 본인의 아들은 전문대만 겨우 졸업시킬 수가 있었다.
늦게둔 큰 아들이 혼기에 접어 들었다.
직장도 변변치 않고 많이 배우지도 못한 아들을 둔 탓에
며느리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그저 사람 됨됨이만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주변 사람의 소개로
양가 부모들도 서로 아는 가까운 동네 처자를 며느리로 맞게 된다.
학업은 가정 형편(시골)때문에 비록 중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으나
키도 크고 인물도 남에 축에 빠지지 않았고 성품도 착했다고 한다.
아들 딸 남매를 두어 둘째 아이가 아장 아장 걸을 무렵
며느리가 시 아버지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며 하는말,
못배운게 한이 되는데 야간이라도 학교에 다니면 안 되겠느냐는 거였다.
가뜩이나 딸들을 가르치지 못한게 마음에 늘 걸렸었던 참이라 혼쾌히 승락을 했고
며느리는 그렇게 고등학교와 대학교 공부를 마치게 됐다.
그런데 아뿔싸 !
며느리가 학교를 다니면서 다른 남정네를 알게 됐던 것이다.
결국 아이둘을 남겨둔채 며느리는 집을 나가고 만 것이다.
이혼을 한 아들이 다시 재혼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98세의 파란만장한 그 촌부의 삶은 끝나고 만다.
그 촌부의 눈에 비친 공부란 무엇이고 인연은 어떤 색깔이였을까 ?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며칠동안 가슴이 답답하고 멍한 생각뿐이였다.
그 촌부는 고등학교 시절 여름방학때 매번 찾아가
며칠씩 묵고 오기도 했던 친구의 시골 외할아버지다.
글 / 산골 너구리.
Dreamy Love Song - Gheorghe Zamf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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