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그곳에 가고 싶다

'악마의 입' 속에는 고드름이 거꾸로 자란다

서프란 2011. 1. 27.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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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 고드름 굴 (악마의 입)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을 구겨놓은 듯, 한반도는 골 깊은 땅이다. 옛날에는 신선들이 그 깊은 골 속에 숨어 살았다고 했다. 동굴은 또 좀 많나. 곰과 호랑이가 마늘이랑 파로 연명하던 태곳적 동굴부터 만장굴·환선굴·대금굴·고씨동굴·성류굴·용연굴·김녕사굴·협재굴, 그리고 경기도 연천 폐터널 동굴. 폐터널?

그냥 문 닫은 터널이 아니다. 악마 아가리처럼 어둡게 벌린 입구 속에 환상이 있다. 상상 혹은 기대의 범위를 벗어난 희한한 세계가 있다. 반전(反轉)도 이런 반전적인 경치가 없다. 달리 붙일 이름이 없어서, 사람들은 그 터널 속 풍경을 '역(逆)고드름'이라고 부른다.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폐터널은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고대산 중턱에 있다. 경원선 남쪽 종착역인 신탄리역에서 북쪽으로 3.5㎞다. 신탄리역을 지나면 '역고드름'이라는 이정표가 크게 눈에 들어온다. 더 정확하게는 서울에서 철원으로 북상하는 3번국도 경기도와 강원도 도계 이정표에서 1~2m 경기도 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 있다.

악마 아가리 속 별천지(別天地)
경기도 연천에 있는 폐터널 입구. 속은 별천지다.
눈 덮인 비포장길 정면은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현장 입구 왼편으로 길이 이어진다. 조심스럽게 차를 몰거나 걸어가면 용도 폐기된 철도 교량 오른편으로 길이 사라진다. 작은 공터가 나오고 거기에 아까 봤던 '역고드름' 팻말이 서 있다.

이미 사람들 발길로 다져진 논두렁을 걸어 오른다. 하이힐을 신고도 별 무리 없는 길을 5분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문제의 '악마 아가리'가 입을 벌린다.

섬뜩하다. 산에서 떨어져 내린 물이 터널 입구 오른쪽에 장막 같은 고드름으로 얼어붙었다. 푸르스름한 그 광채는 언뜻 보면 아름답되, 자세히 보면 날카롭기 짝이 없는 칼날들이 땅을 향해 달라붙어 있다. 입구 한쪽은 터널 속 암흑이 그대로 보인다. 문자 그대로, 흉측하고 거대한 괴물이 입을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는 형세다.

그것만 해도 신기한데, 입구 속으로 걸음을 옮기면 입이 벌어진다. 터널 안쪽이 온통 고드름으로 장식돼 있는 것이다. 천장에도, 바닥에도, 옆 벽에도.

한마디로 기경(奇景)이다. 땅바닥에 새하얀 얼음기둥들이 도열해 있는 것이다. 지름이 10㎝쯤 돼 보이는 얼음기둥들이 어둠 속에 꼿꼿하게 서 있다. 경사진 입구쪽 빙판은 물론, 밟으면 먼지가 날릴 정도로 건조한 안쪽 땅바닥에도 얼음기둥들이 뿌리를 박고 있다. 입구쪽 천장에는 밖에서 봤던 그 날카롭고 거대한 고드름들이 붙어 있다.

동굴 밖에서 휘몰아치는 강풍이 천장쪽 고드름을 사정없이 흔들어댔고, 그래서 그 고드름들은 형태가 상당히 미학적이다. 미학적이되 위험하다. 그래서 중앙부에는 사고 방지용으로 철조망을 둘러놨다. 땅에서 자란 고드름들은, 추상작가의 조각작품 같다. 고드름이 성장하는 매일 매일 기온과 바람 상태에 따라 굵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대나무처럼 마디가 맺혀 있다. 전형적인 삼한사온 현상이 벌어지면, 그 마디마디 굵기가 다 달라서 훨씬 아름답다. 터널 안쪽에는 마른 땅에 조각상처럼 고드름이 서 있다. 막혀 있는 안쪽 벽에는 아예 얼음 군상(群像)이 도열해 있다. 도대체 왜? 동굴에서 만난 주민은 "미군 폭격 때 천장에 금이 가면서 겨울이면 물이 떨어져 고드름을 만든다"고 했다. 미군 폭격이라고?

이 땅 모든 깊은 골에 숨어 있는 사연이 이 터널이라고 없을 리 없다. 사연은 이렇다.

터널은 일제 말기에 건설됐다. 그런데 건설 도중에 토지 측량을 실수한 사실이 드러나 기차 노선 자체가 변경됐다. 연천군청은 "토지대장상 터널 주변이 그 옛날부터 사유지로 기록돼 있다"고 했다. 그런데 훗날 6·25전쟁이 터지며 인근 백마고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고지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이 터널에 인민군이 탄약고를 세웠다, 미군이 대대적인 포격을 퍼부었다, 인민군은 탄약고에서 인민을 대량 학살하며 포격을 앙갚음했다, 그래서 이 고드름은 그 학살된 인민들의 혼령이다 기타 등등. 진실은 아무도 모르기에, 이렇게 폐터널 한 곳에 사연과 전설이 입혀지는 것이다.

고드름이야 겨울 한철 지나면 소멸하는 서글픈 존재지만, 사계절 이 터널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진짜' 종유석이다. 뭐, 종유석?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만들어진 터널 내벽에 물이 흐르고, 그 물에 시멘트 성분이 녹으며 기둥을 만드는 것이다. 종유석도 성분이 석회질이고 시멘트도 기본이 석회석 가루니, 이론상으로는 벽에 붙어 있는 이 작은 기둥들이 위풍당당한 종유석이 아닌가. 억겁 세월 동안 자연이 성실하게 창조한 종유석이 이 폐터널에서는 '한순간'에 창조되고 있다는 말이다.

사진가들이 역고드름굴에 만원사례를 이뤘다. 마치 구도(求道)하듯, 이들은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걸쳐놓고서 침묵 속에 얼음 궁전을 순례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침 굴 밖에 해가 났는데, 그 광채 또한 득도의 순간처럼 눈이 부신 것이었다.


여 행 수 첩

자가운전:
전국 어디든 3번 국도를 타고 연천으로 간다. 외길이다. 신탄리역을 지나 3.5km 정도 가면 길 오른편으로 '역고드름' 이정표가 나오고 금방 경기-강원 도계 이정표가 나온다. 빠지는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무조건 깜빡이를 넣고 정지. 잘 보면 오른쪽 길섶으로 비포장길이 보인다. 경사진 길로 들어가 눈앞에 공사현장이 보이면 다시 왼쪽 길로 들어갈 것. 길은 폐교량 오른쪽으로 이어지는데, 교량 부근에서 길이 급경사로 내려가니 주의. 공터가 나오고, 이정표가 다시 나온다. 공터에서 걸어서 4~5분.

기차: 뭐니 뭐니 해도 기차가 제일이다. 동두천역까지 전철로 간 뒤 경원선 통근열차로 갈아타서 신탄리역 하차. 매 시각 50분에 동두천역 출발. 역고드름까지는 들길을 걸어서 가거나 택시를 이용할 것. 신탄리역 출발은 매 시각 정각. 막차는 22시.

명산 고대산이 있다. 신탄리역에서 바로 등산로로 이어진다. 고대산은 낙엽송 천지여서, 등산로 초입만 산책해도 그 풍광을 보며 실컷 즐길 수 있다. 일찍 출발했다면 철원도 금방이다. 땅속에서 발견된 철불을 모신 도피안사가 있다.

①약수식당: 신탄리역 입구. 순두부를 비롯한 한식을 낸다. 각종 나물 반찬이 깔끔하고 손맛이 좋아 등산객들 사이에서는 소문난 집이다.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 271-34, (031)834-8331

②망향비빔국수 본점: 신탄리에서는 좀 떨어져 있지만,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이 매운 비빔국수만을 위해 연천으로 달려가는 사람들도 있다. 전국에 퍼져 있는 망향비빔국수의 본점이다. 양념육수에 오이·상추·김치·치커리 등등을 얹어 낸다. 비빔국수, 잔치국수 5000원. 안 매운 아기국수 1000원. 손만두 3000원. 소요산역을 지나 재인폭포 이정표 따라 우회전, 군부대 건너편으로 간판.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궁평리 231-2, (031)835-3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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