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인터넷 오이깍기.

서프란 2006. 9. 23.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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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꾼은 인터넷에서 오이를 깎는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최소정(27) 씨는 평소 인터넷에서 ‘오이’를 ‘깎’는다. 처음에는 단순한 동그라미 네모를 그렸지만, 이제는 ‘이누야샤’ 같은 인기 만화 캐릭터도 척척 그려낸다. 최 씨가 ‘오이 조각이라도 하나보다’고 생각하면 오산. 요즘 인터넷에서 ‘오이깎기’란 그림 게시판 툴로 더 잘 통한다. 자그마한 ‘웹 캔버스’에 마우스로 그림을 그린 후 저장하면 업로드 되는 게시판이다.


오이깎기라는 이름도 2000년께 일본인 네티즌 Poo씨가 인터넷에 배포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그림 툴 ‘오에카키’에서 나왔다.

작가 층은 초등학생부터 미술 전공자까지 다양하다. 처음 한국에 소개될 때만 해도 만화나 미술관련 개인 홈페이지에서 아는 사람들만 했지만 최근에는 네이버, 싸이월드와 같은 대형 사이트에서도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오이깎기 열풍에 동참하게 됐다.

마우스로 그런 그림이라고 우습게보면 큰 코 다친다. 잘 그린 오이깎기를 보면 ‘마우스로 그린 게 맞아?’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정교한 초상화부터 전문 애니메이터도 울고 갈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19세기 유화를 연상시키는 서양화, 먹물을 뚝뚝 찍어 그린 듯 운치 있는 동양화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즐비하다.

∇‘마우스로 그린 게 맞아?’ 인터넷은 오이깎기 열풍∇

인터넷 관객들의 반응도 폭발적이다. 일단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명작으로 소개된 오이깎기 작품에는 “사진인가, 그림인가”, “나도 저렇게 그려봤으면”하는 부러움 섞인 칭찬 댓글 행진이 이어진다. 다운로드해서 영구 소장하겠다는 팬들도 부지기수다.

▶ 오이깎기 작품 갤러리 화보 보러가기

닉네임 ‘퀸즈향’으로 유명한 ‘오이명인(名人)’ 김윤주 씨는 “다수에게 자신의 그림을 소개할 수 있고, 관객의 반응도 금방금방 알 수 있다는 개방성이 바로 오이깎기의 가장 큰 매력”이라며 “이 때문에 미술 전공자들도 오이 계에 입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도 미대에서 강사를 하다가 현재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전공자다.

그림을 구경하던 무리에서도 ‘나도 해볼래’하고 뛰어드는 경우도 흔하다.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와 마우스면 누구나 화가가 될 수 있기 때문. 네이버나 싸이월드 같은 오이깎기 게시판이 활성화된 곳은 하루에도 수백 건씩 ‘작품’이 쏟아진다.

사용법도 간단하다. 그리기 버튼을 누른 후 캔버스가 나오면 메뉴바에 있는 붓, 페인트, 스크린톤 기능과 색깔을 선택해 그리면 된다. 그리는 중간 임시저장도 할 수 있고, 포토샵과 유사한 레이어 기능도 있다. 누리꾼들은 일단 그림 욕심이 생기면 마우스 대신 성능 좋은 타블렛이나 펜마우스를 장만해 그리기도 한다.

고교생 조윤비(17) 양은 “수업 시간에 공부하다가도 눈에 아른거릴 정도로 오이깎기는 중독성이 강하다”며 “4시간 동안 오이를 깎다가 컴퓨터 다운으로 날려 먹은 기억이 ‘내 생애 가장 끔찍한 악몽’”이라고 말했다.

∇쉿~! 오이깎기 잘 그리는 비법은…∇

매니아들에게 ‘오이 잘 깎는 법’은 가장 큰 관심사일 수 밖에 없다. 오이명인 ‘퀸즈향’ 김윤주 씨와 ‘사가카노’ 최혜영(20) 씨 두 사람에게 오이깎기 비법을 들어 보기로 하자.

우선 김 씨의 오이깎기 모토는 ‘단순하고 과감하게’.

“단색 그림이라도 일단 그려라. 데생을 해본 사람이라면 스케치를 하고 시작하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다. 나는 아직도 레이어나 투명도를 사용하지 않는다. ‘재미’가 관건이다. 많이 그리고 많이 보다 보면 눈이 생기고 손감각도 는다.”


구체적으로 <그림 2>를 보면서 따라해 보자. 김 씨와 함께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의 주인공 오동구 군을 그려보자.

우선 △기본적인 구도와 비례를 생각하면서 스케치에 들어간다. △얼굴 전체를 빨강과 갈색으로 연하게 조절해서 칠해 주고, 역광 부분도 살려준다. △얼굴의 어두운 부분과 빛을 받는 모습을 묘사해 주고 △옷 부분에 전체적인 채색과 주름을 조금씩 잡아간다. 이때 어두운 색은 나중에 칠해 준다. △번짐 효과가 필요 없는 배경이므로 빨강과 검정을 섞어서 한번에 칠해주고 어두운 부분을 완성하면 작품 하나가 탄생된다.

오이 입문 1년 만에 유명인사가 된 최혜영 씨도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는 대학생. 최 씨는 가수 슈퍼주니어를 정말 똑같이 그린 시리즈로 유명하다.

최 씨는 김 씨와는 반대로 투명도와 레이어의 사용 기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선을 그릴 때나 색칠을 할 때 투명도가 가장 중요하다. 바로 계단현상 때문이다. 선을 그냥 쓰면 픽셀이 계단 현상으로 나와 그림이 거칠어진다. 투명도를 10~20%정도에 놓고 그리면 계단 현상이 없어진다. 색칠을 할 때도 투명도를 10~20%에 두고 하면 선이 좀더 부드러워지고 입체적이 된다.”

구체적으로 <그림 3>을 보면 △검은색을 투명도 10~20%로 놓고 스케치 한 후 △스케치 레이어에 머리색을 페인트로 붓는다. △이미지를 확대하면 도트처럼 보이는 계단현상이 나타난다. △부드러운 채색을 위해 머리 색상의 투명도를 20~35%로 준 다음 거칠어진 부분을 펜 툴로 색칠하면 된다.

레이어 사용법은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때와 만화를 그릴 때가 다르다고 강조한다. 최 씨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때는 윤곽선이 그려진 스케치를 레이어 1번(맨 위에 있는 레이어)에 하고, 레이어 3번에 밝은 색을, 2번에 명암을 넣어준 후 레이어 1번 스케치를 지우개로 지워준다 △만화의 경우는 윤곽선이 보여야 하니까 레이어 2번에 윤곽선을 그리고 3번에 색칠을 한다. 1번은 덧칠을 하거나 서명을 넣는다고 설명했다.

∇“오이깎기도 예술이다!”∇

최 씨는 “오이깎기도 당당한 예술”이라고 말한다. 포토샵이나 페인터 같은 프로그램에 비해 보잘 것 없는 그림 게시판에 불과하지만, 많은 아마추어들이 그 작은 캔버스 안에서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예술이라는 것.

그는 “오늘날 인기 있는 팝 아트처럼 창의적인 오이깎기도 언젠가 미술관에 걸리는 날이 올 것”이라며 “예술의 한계는 없다”고 강조했다.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